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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young Jung


저자 : 강경애 저작물명 : 강경애_그 여자 (1932년) 저작자 : 강경애 창작년도 : 1932


Drama All public.

#여성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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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여자


그는 얼결에 머리를 들며 눈을 번쩍 떴다. 그리하여 한참이나 사면을 둘러보다가 아무 인기척도 발견하지 못함에 그의 긴장되었던 머리는 다소 진정되었다.

어디선가 짹! 짹! 하는 새소리에 그는 꿈인가 하여 겨우 눈을 뜨고 보니 아까 미친 듯이 일떠나던 자신의 꼴이 얼핏 생각키워 문켠을 바라보며 선뜻 일어앉았다.

재잘대는 참새소리는 그의 젊음을 노래해주는 듯 그의 전신은 어떤 새 힘이 물결침을 느꼈다. 그리고 이 순간에 모든 영화는 자기만을 위하여 존재한 듯 싶었다.

그는 젖통을 어루만지며 이 손이 만일 남자의 손이라면 하는 생각이 들자 갑자기 귀밑이 확확 달아 얼핏 손을 떼면서도 어떤 쾌감을 느끼었다. 그리고 옷을 끌어당기며 보니 벽에 걸린 면경 속으로 아담스러운 그의 어깨 위가 둥그렇게 드러났다. 그리고 그 밑으로 칠같은 머리카락이 구슬구슬 내리어 있었다. 이 순간에 그는 옷 입을 생각도 잊고 무엇에 홀린 사람처럼 한참이나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꿈 같은 이 방안도 차츰 새어온다. 어느덧 전깃불이 껌풋하고 꺼져버림에 그는 벌컥 일어나 옷을 입고 뒷문을 열었다.

밖으로부터 들어오는 산뜻한 바람은 그의 전신을 날 듯이 해주었다. 그리고 이슬에 빛나는 백양나무 숲속으로 늦은 봄 짙은 풋냄새가 그윽히 새어들었다.

그 문켠에 몸을 기대고 서서 머리를 들었다. 그믐밤의 별같이 종종한 나뭇잎과 나뭇잎, 그 속으로 웃을 듯 웃는 듯이 나타나는 파란 하늘, 그리고 나뭇잎가로 붉은 선을 치고 돌아가는 광선에 그는 자신을 떠나 멀리 허공으로 헤매었다.

아까 면경 속으로 비치던 그의 둥근 어깨 위가 나타나며 그를 중심으로 덤벼드는 수많은 사내들의 얼굴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휙휙 지나쳤다. 따라서 잡지에 실린 그의 소곡(小曲)과 자신의 사진이 선히 떠올랐다.

그는 생긋 웃으며 '놈들, 저들이 백날 그러면 소용이 무언가.' 무의식간에 이런 말이 굴러나오며 입모습에는 비웃음이 떠돌고 있었다.

그에게 남자들에게서 오는 편지가 많을수록 그리고 그의 지은 글이 어떤 잡지에 달마다 실리게 되었을 때 그의 자존심은 까맣게 높아져 갔다. 그리고 그는 어떤 높은 탑 위에 선 듯하였다.

그는 생김생김과 같이 감각이 예민하였다. 누구에게나 어느 시기에 있어서는 시 한 구 지어보지 않는 사람이 없고 소설 권이나 읽지 않는 사람이 없는 것처럼 시기가 시기인 것만큼 그에게 있어서도 애틋한 정서가 흘렀다.

그래서 그런지 그는 신문을 보거나 잡지를 대하게 되면 반드시 문예란부터 뒤져 보곤 하였다. 그래서 본 대로 몇 번 장난 비슷이 지어보다가 어떤 아는 남자 편지 화답 끝에 써보낸 것이 동기로 그는 일약 여류문사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그에게 있어서는 어째서 자기가 이렇게 쉽사리 여류작가가 되었는지 반성해 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저 자기와 같은 재사(才士)는 드물다는 것 그것밖에는 없었다. 그러므로 누구를 대하든지 먼저 상대자가 마리아라는 자기의 이름은 말하지 않아도 다 알고도 지나친 것으로 생각되었다.

길가에 나서면 모든 사람들의 눈이 자기 한 사람에게로 집중된 듯하며 그만큼 자기는 인기 인물같이 생각되었다. 무엇보다도 여자로서는 글 쓰는 사람이 적은 것만큼 자기 한 사람에게만이 가능하다고 인정됨으로써였다.

그는 지금도 이러한 생각으로 가슴이 뿌듯함을 느꼈다. 그리고 앞에 전개되는 모든 경치를 의미있게 바라보며 무엇이라도 써볼까 하고 요리조리 뜯어 모아보았다. 그러나 어쩐지 모르게 그럴 듯 그럴 듯한 곳은 있건마는 막상 붓을 들고 쓰려고 하니 홀랑 어디로 달아나버리고 만다.

"선생님, 진지 잡수시어요."

그는 놀라 학생 선 켠을 돌아보며 자기 손목을 내려다보았다. 있으려니 한 시계는 없고 흰 팔 위에 시계자리만이 음쑥하니 남아 있었다. 순간에 그는 가슴이 선뜻하여 머리맡 켠으로 머리를 숙이니 면경 옆에서 째깍째깍하는 다정스러운 시계소리에 그는 안심하고 시계를 집었다.

"무슨 아침이 그리 이르냐."

아까와는 딴판으로 살짝 웃으며 이렇게 물었다.

"선생님 오늘 외촌에 가신다면요."

"오, 참…… 내 잊었구나. 그래 나가마."

그제야 엊저녁 늦도록 연제될 성경 절 찾던 생각이 얼핏 들었다. 따라서 오늘 자기가 갈 얼두거우(二頭거)라는 지명이 새삼스럽게 생각키웠다.

학생은 돌아서 나갔다. 그의 삼단 같은 머리채 끝에 나풀거리는 댕기꼬리가 뚜렷이 그의 눈에 비쳤다. 여기에 따라 옛날 그의 학생시절이 다시금 그리워졌다.

학생의 신발소리가 멀어지자 그는 수건과 비누를 가지고 밖으로 나왔다. 언제 떠놓았는지 세수소래에는 물이 가득하여 가는 바람결에 잔주름이 약간 잡혔다. 그는 참새소리 틈에 어렴풋이 들리는 학생들의 시시대는 소리를 들으며 가만히 물 속에 손을 넣었다.

세수를 다한 그는 방안으로 들어서자 면경 앞으로 다가앉았다. 면경을 대하니 아까 비치던 자기의 토실토실한 그 어깨가 다시금 보이는 듯했다. 그는 크림을 손에 묻혀가지고 가볍게 부벼친 후 불그레한 얼굴 위에 마찰을 시작하였다. 방안은 크림냄새로 자욱하였다.

가볍게 흔들리는 나뭇잎소리를 따라 외줄기 광선이 방안 가운데 얼씬 얼씬 떨어졌다. 방안은 갑자기 환해지는 듯하였다. 그리고 차츰 희어가는 그의 얼굴.

화장은 다 마친 그는 면경 옆에 펼쳐 있는 성경책을 끌어당기며 '과연 내가 사내놈이라도 너를 보면 반하겠다.' 하고 면경 속을 들여다보며 머리를 끄덕이었다. 이렇게 생각만을 하고서도 누가 있지나 않았나 하는 불안으로 뒤를 돌아보고야 안심하였다.

그는 성경책을 뒤적거려 어제 찾아본 성경 절을 찾아놓고 다시금 생각해보았다. 뒤이어 농민들의 이 모양 저 모양이 보이는 듯했다. 그리고 그의 고향에서 본 선하게 낯익은 농부들의 모양이 보였다. '그들이 알아 들을까?' 하고 그는 얼굴을 잠깐 찌푸렸다.

그가 고향에서 본 농부들이란 오직 먹는 것과 애 낳는 것, 일하는 것밖에는 아무것도 모르는 듯했다. 좀더 그들 중에서 무엇을 안다는 것을 기어코 지정하자면 고담(古談)에 나오는 유충열이나 조웅을 알 법이지, 그 외에는 나라가 어찌 되는지 민족이 어찌 되는지 그저 태평이었다.

뫼산자 보에다 바가지 몇 짝을 달아매고 구럭짐 몇짐 짊어지고 어린 것들을 앞세우고 나서면서까지도 어째서 자기네는 그리운 고향을 등지게 되나? 어째서 가산을 탕패케 되었나?를 생각해보지 못하고 다만 운명에 돌리고 못나게 우는 농부들이었다.

그런 생각하니 마리아는 얼두거우에 가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농부들은 어디 농부들이나 마찬가지로 생각되었던 것이다. 제일 못난 것이 농부들인 동시에 제일 불쌍한 사람이 농부들이라고 생각되었다. 구할래야 구할 수 없는 그런 불쌍한 인간들로 생각되었던 것이다.

아침을 먹은 마리아는 학생들의 전송을 받으며 마차 위에 몸을 실었다. 뒤따라서는 심얼심얼 얽은 전도부인이 까만 책보를 들고 올랐다.

말똥 냄새가 훅 끼치며 가슴이 메슥해지는 것 같아 그는 소매로부터 수건을 내어 입에 대었다. 수건 끝에서 가볍게 이는 크림냄새는 곁에 앉은 전도부인에게까지 물큰 스치었다.

보기에도 험상궂은 마부는 무엇이라고 소리를 빽 지르며 채찍을 둘러메니 말은 네 굽을 뛰었다.

한번 대답해놓은 것이라, 더구나 교장의 명령을 받아 할 수 없이 마리아는 이렇게 떠나나 어쩐지 불쾌하고 께림직하였다. 그러나 한편으로 문예가는 때때로 여행도 해야 한다더라 하는 생각을 하자 농부들보다도 농촌의 자연미를 구경하는 호기심 그것에서 어떤 명작이나 하나 얻을까 하는 바람이 그로 하여금 커다란 기대를 갖게 하였다.

그가 용정에 들어온 후에 이렇게 외촌으로 나가보기는 아마 이번이 처음일 것이다. 이번도 얼두거우 예수교 안으로 설치된 부인 청년회에서 정화여학교 교장에게 연사 부탁한 것이 하필 마리아가 떠나게 된 것이다.

그는 돌아보았다. 아직도 학생들은 서서 손짓을 하였다. 그도 마주 손짓을 하며 약간 미소를 띠었을 때 마차는 어떤 집 모퉁이를 돌아섰다.

콩기름 냄새가 그들의 코를 훅 찌르며 기름 튀는 소리가 복질복질 부지지 하였다. 그는 얼핏 바라보니 부엌문 사이로 아궁에서 일어나는 장작불이 발갛게 보였다.

마리아는 어쩐지 섭섭한 생각이 들어 다시금 뒤를 돌아보니 지붕과 지붕 위로 기숙사 울타리인 백양나무 가지가 반공 중에 푸르러 있었다. 그때에 '내가 이 학교일을 그만 보고 아주 고향으로 이렇게 간다면.' 하는 생각을 하며 다시금 뒤를 돌아보았다.

아침 연기 속에 어린 용정기사는 콩기름과 돼지기름 맷새로 둘러싸였다. 그리고 가고오는 물지게 소리며 고기 사오, 백채 사오, 하는 서투른 조선말로 외치는 중국인의 굵고도 줄기찬 소리가 모퉁이 모퉁이에서 굴러나왔다.

구멍가게 옆에는 반드시 길다란 나무가 꽂혔으며 그 위에는 널조각나무로 가로지른 후에 그 가운데에는 '천홍호(天興號)' '원흥태(元興泰)'라고 한 간판이 뚜렷하게 써 있었다. 그리고 오색종이를 체바위같이 둥글게 뭉쳐 문전 좌우인 매단 집 문앞에는 시커먼 널빤지가 놓였으며 그 위에는 새로 쪄다놓은 만두가 가는 김을 토하고 있었다.

대통로로 들어선 그들은 신록에 빛나는 가로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중국애와 조선애들이 서로 손을 잡고 뛰어 다니는 꼴이 나무 사이로 얼씬 얼씬 보였다.

네거리를 지날 때마다 등 굽은 순사들이 무엇이 추운지 아직도 솜바지 저고리를 통통하게 입고 총자루를 가로 쥔 후에 지나가고 오는 사람들을 흘끔흘끔 쳐다본다. 이마에는 기름기가 번질번질, 손톱은 매발톱처럼 비쭉한 것으로 이따금 코진자리를 흥켜내고 있다.

갑자기 지릉지릉 울리는 종소리에 놀란 마리아는 어디서 그런 소리가 나는가 하고 둘러보니 자기가 탄 마차에서 그런 훌륭한 소리가 났다. 그러므로 그는 마부의 뒷덜미를 바라보며 '종 하나는 제법 친다.'하고 픽 웃었다.

앞으로 오는 채마장수는 종소리에 이편으로 물러서며 땀을 씻는다. 광주리에 실은 배추는 약간 이슬을 품은 채 다문다문 흙에 묻히어 있었다. "아이 저 배채 보아요. 저렇게 자랐어."

전도부인은 배추에 탐이 났던지 이런 말을 하였다. 마부도 휘끈 돌아보며 다소 알아들었다는 듯이 싱긋 웃으며 그 누런 이를 내놓았다. 마리아는 그만 그 이에 놀라 머리를 돌리었다. 그리고 금시로 먹은 것이 나오는 듯해서 그만 입을 다물고 눈을 내리떴다.

전도부인도 이 눈치를 채었는지 빙긋이 웃으며,

"저것들은 아마 평생 이를 닦지 않는 모양입니다."

"아이참 어쩌면……"

마리아는 이렇게 중얼거리며 해종일 저 꼴 볼 것이 난처하였다. 그리고 저것들도 인간이라고 할까? 하는 의문이 불시에 일어났다.

어느덧 시가지를 벗어난 마리아는 푸른 들을 바라보다가 무심히 뒤를 돌아보았다. 차츰 멀어져가는 용정시가 속에 붉고도 푸른 벽돌집 위에는 태양볕이 둥그렇게 번쩍이고 있었다.

아득히 바라보이는 산기슭에는 젖빛 안개가 뭉실뭉실 떠돌고 시선 끝까지 푸르러 있는 위에는 햇빛이 천 갈래로 만갈래고 찢어 떨어져서 한층 더 푸르게 하였다.

가다가다 토담으로 둘러싼 포대는 산새똥으로 허옇게 되었다. 돌아올 줄 모르는 손주를 기다리는 자애스러운 늙은이의 그 얼굴 그 슬픈 표정이었다.

길가 좌우에는 이름 모를 좁쌀꽃이 빨갛게 노랗게 피었다. 그 푸른 잔디밭 속에 개미가 토굴을 파고 쇠똥구리가 쇠똥을 나르는 그 세계에도 이러한 자연이 그들을 얼싸 안고 있었다.

그날 오후 두시에 마리아는 얼두거우 예수교내 강당 위에 높이 서서 요한복음 3장 16절을 가지고 믿음이란 문제로 강연을 시작하였다.

교회당은 불과 열 칸이 될까 말까 한데 교인은 방이 터져라 하고 모여 들었다. 물론 교인뿐만이 아닌 줄 마리아도 잘 알았다.

문안으로 들어서는 이마다 모두가 흑인종같이 보였다. 그 옷주제며 햇빛에 그을 대로 그을은 얼굴들이 바라보기에도 끔찍하였다.

마리아는 입으로는 무엇이라고 지껄이면서도 속으로 딴 생각이 자꾸만 들어왔다. 말하자면 자기는 닭의 무리에 봉이 한 마리 섞인 듯하고 흑인종에 백인종이 섞인 듯한 느낌이었다. 따라서 저들이 나를 얼마나 곱게 볼까, 내 말에 얼마나 감복이 될까, 하는 생각이 들자 자기도 모르게 생각지도 않은 열변이 낙수처럼 떨어졌다.

비록 성경책을 내놓고 믿음이란 문제를 걸어놨을망정 사뭇 문제와는 딴판으로 노동자 농민을 부르짖고 현대 조선 사회상을 들추어냈다.

군중은 비 오다 그친 것처럼 잠짓하여 마리아의 놀리는 입술과 그 요리조리 굴리는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어쩐지 자기들과는 딴 인종 같으며 따라서 열과 피가 없고 말하자면 어떤 어여쁜 인형이 기계적으로 말하는 듯한 ―― 그의 입 속으로 노동자 농민이 굴러 나올 때 황송 거북스럽고도 미안하게 생각되었다. 그리고 저가 어떻게 노동자 농민을 알게 되었는가? 하는 의문을 품지 않을 수가 없었다.

마리아의 폐병자의 초기 같은 그의 얼굴빛이며 짙게 그린 눈썹 아래로 깜빡이는 눈만이 살은 듯하고 그 나불거리는 입술만이 마리아의 전체에 대하여서는 너무나 부자연한 듯하였다. 따라서 그들의 머리에는 '공부한 신여성' 무엇을 안다는 여자는 다 저 모양이지 하는 생각만으로 뚜렷이 짙게 되었다.

"여러분, 죽어도 내 땅에서 죽고요, 살아도 내 땅! 내 땅에서 살아야 한단 말이어요. 무엇하러 여기까지 온단 말이어요! 네. 그렇지 않어요 네. 내 잔뼈를 이룬 땅이요, 내 다만 하나인 조업이란 말이지요! 여러분, 아십니까? 모르십니까? 산명수려한 내 땅을요!"

마리아는 그의 백어 같은 손으로 책상을 치며 부르짖었다.

군중은 무의식간에 흐응!하고 비웃음과 함께 이때껏 지리하던 한숨이 흘러나왔다. 무엇보다도 어린 처자를 앞세우고 울며불며 내 고향 떠나던 생각이 떠올랐던 것이다.

"그래도 내 땅 안에 있으면 이 쓰림, 이 모욕은 받지 않지요. 그래 남부여대하여 이곳 나와서 한 일이 무엇입니까. 네? 아무래도 내 동포밖에 없지요. 우리가 외로울 때 즐거울 때 가난에 찌들 때 같이 울고 같이 걱정해줄 이가 누구여요. 우리 동포가 아니여요. 그러니까 이 목이 달아나고 이 몸뚱이가 분골쇄신이 되더라도 내 땅에서 살아야 한단 말이어요. 네?"

마리아의 눈에서는 눈물까지 흘렀다. 군중은 이 이상 더 참을 수 없이 저리 뱃속 깊이 가라앉았던 분까지 치떠밀었다. 그들의 앞에는 지주들의 그 꼴이 시재 보는 듯이 나타났던 것이다.

손발이 닳도록 만지고 또 만져 손 끝에 보드라워진 그 밭! 그 밭이랑에 쌓여 있는 수없는 풀뿌리며 논귀에 숨어 있는 그 잔돌까지라도 헤이라면 헤일 수 있는 그렇게 정들인 그 밭! 그 논을 무리하게 이유없이 떼이었을 때, 아아, 그들의 가슴은 어떠했으랴!

그들의 즐거움과 기쁨이 있었다면 오직 이 밖에 없었고 그들의 용기와 삶의 애착이 있다면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하루아침에 가볍게 놀리는 그 무서운 입술에서 떨어지는 그 잔인무도한 말은 그들을 쫓아내고야 말았던 것이다.

마리아의 말과 같이 슬픔과 괴로움을 같이하는 그들이었던가! 그들의 사정을 털끝만치라도 보아주는 그들이었던가.

군중의 눈앞에는 그 지주의 그 눈! 그 얼굴이 새삼스럽게 커다랗게 나타나 보였다. 그리고 자기들이 쫓겨났던 그때 일이 다시금 나타나 보였다.

"민족이 뭐냐! 내 땅이 뭐냐!"

저켠 창 밖으러부터 이런 소리가 우레소리같이 났다. 순간에 마리아는 가슴이 선뜻하였다. 그리고 '간도농민'하고 그의 머리에 얼핏 떠올랐다.

그것은 전일 간도농민은 무던히 무섭다는 말을 들었던 까닭이었다.

마리아는 가볍게 한숨으로 일어나는 공포를 쓸어치어 '적어도 나는 조선의 최고 학부를 마치었으며 더구나 조선에서 드문 여류작가이고 게다가 어여쁜 미모의 주인공이다.' 이러한 생각을 하며 까칠한 눈으로 그들을 노려보았다. 그 입모습에는 확실히 비웃음이 떠돌았다…… '농민이 아니냐'하고 마리아는 속으로 부르짖었다.

군중은 마리아의 이러한 태도를 바라보았을 때 이때껏 어여쁜 귀여운 마리아로만 생각했던 것이 잘못임을 깨달았다. 그리고 자기들이 극도로 미워하는 돈 많은 계집의 특성이 마리아의 전체에서는 물결침을 느꼈다. 마리아의 하늘거리는 흰 치맛가의 가는 파동은 군중의 무지를 조롱하는 듯 비웃는 듯하였다. 그때에 군중의 머리에는 며칠 전에 미음 한 그릇 따뜻히 못 먹고 죽은 그들의 아내며 그들의 누이며 사랑하는 딸들이 마리아의 좌우로 나타나는 것을 보았다.

자기들의 누이와 아내는 이 여자를 곱게 먹이고 입히기 위하여, 공부 시키기 위하여 이 여자 살빛을 희게 하여주기 위하여, 못 입고 못 먹고 못 배우고 엄지손에 피가 나도록, 그 험악한 병마에 걸리도록 피와 살을 띠우지 않았던가?

이러한 생각을 하고 나니 마리아의 뒤에 둘러앉은 목사와 장로까지도 자기들의 살과 피를 빨아먹는 흡혈귀같이 보였다. 아니 흡혈귀였다.

그들은 갑자기 욱 쓸어 일어났다. 그리하여 자기들도 모르는 사이에 교회당이 짓모이고 종각이 쓰러졌다.

마지막 비명을 토하는 종 옆에 갈갈이 옷을 찢긴 마리아는 쓰러져서도 자기의 미모만을 상할까 두려워서 두손으로 얼굴을 꼭 싸쥐고 풀풀 떨고 있었다.

Sept. 27, 2023, 8:37 a.m. 0 Report Embed Follow 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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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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